76세와 7세가 동기???!
美 암릉서 외친 "나는 한국인"
LA 근교 샌 하신토 산(3,302m) 자락에서 2주 교육 진행

등반 교육을 받는 재미산악연맹 등산학교 학생. 처음엔 낯설어 하더니 훈련이 거듭될수록 등반을 즐기고 있다.
미국 LA에서 등산학교가 열렸다.
2022년 제19기 카파KAFA등산학교가 그것.
카파는 재미대한산악연맹의 부설 등산학교 이름이다.
LA 근교에서 두 번째로 높은 샌 하신토 산Mount San Jacinto(3,302m) 자락의 허키 크릭 단체캠프장.
그곳을 베이스캠프로 아이딜와일드 암장에서 실시된 이번 교육엔 모두 24명이 등록했다.
지난 5월 21일 LA한국교육원에서 입학식과 이론 강의를 시작으로
6월 12일 아이딜와일드 암장에서 졸업 등반을 가진 것.
2주 교육과정을 무사히 끝내고 진행된 졸업식에서 3명이 탈락하고 21명의 예비 산악인이 탄생했다.

캠핑장에 걸린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카파(재미산악연맹) 등산학교 깃발.
입교생 구성이 놀랍다.
칠순을 훌쩍 넘긴 이민 1세대부터, 1.5세대와 2세대 3세대들까지 참여했다.
76세 노익장과 7세 손주뻘이 동문이 되었던 등산학교.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미국에서 한국어로 교육하는 등산학교라니. 많은 인종이 함께 어울려 사는 미국이지만
등산학교를 운영하는 민족은 한인사회뿐.
등산학교가 19회의 연륜을 쌓아 갈 수 있었던 동력은 한국에서부터 나왔다.
운영진들은 거의 한국에서 등산학교 강사를 역임했거나 졸업생이기 때문.
이번 학기에도 대표강사로 활동한 유영용씨는 서울시산악연맹에서 활동했던 구조대원.
재미산악연맹 오석환 회장이 교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등산학교 강사 출신이다.

나이 지긋한 등산학교 학생이 훈련에 쓸 자일을 메고 교육장으로 향하고 있다.
졸업식을 주관하는 오석환 교장의 표정이 밝다.
지난 2003년부터 시작한 등산학교는 지금까지 16기를 배출했다.
팬데믹 때문에 2회를 건너 뛴 등산학교는 올해 처음으로 개최하는 대면 행사.
미주 산악 지도자 육성 및 산악동호인 저변확대를 목적으로 학교가 만들어졌다.
행사에는 전문 강사와 20여 명의 이사들이 봉사자로 참여하고 있었다.
미국 동부에서 비행기를 6시간이나 타고 온 조지아산악회 고문인 이만호씨와
이운선 회장을 비롯 6명의 회원도 보였다.
그들은 자비를 들여 강사와 임원으로 등산학교를 도우러 날아 왔다.
카파등산학교 강사들은 미국 땅에 흩어져 살고 있다.
하지만 등산학교를 연다고 하면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온다.
이번 졸업식도 그러하여 오 교장이나 강사들에게 악우의 정을 절절하게 느끼게 해준 감동의 자리가 되었다.

팔을 벌려 하강하는 학생. 로프 확보가 확실하다는 믿음으로 손을 들어 보인다.

캠핑장에서 이론교육을 받는 학생들. 유영용 대표강사가 강의를 하고 있다.
처음 만나는 특별한 가족
기쁨과 성취는 나눌수록 커진다는 걸 몸으로 체득한 산악인들이기에 가능한 봉사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강사와 이사들은 열정적으로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바위가 생소한 학생들이 오른 바위도 첫 발 첫 단계가 가장 힘들었을 것.
수직의 벽을 올라서려 할 때 두렵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좋은 강사들 지도에 용기를 내어 첫 걸음을 뗀다면 시나브로 불안과 공포는 사라진다.
그렇게 배우는 즐거움과 가르치는 즐거움이 충만한 등산학교의 현장이었다.
먼 땅 미국에서 산을 매개로 학생과 강사가 함께 성취를 느끼는 등산학교가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졸업장을 받은 수료생 중 아주 특별한 가족을 만났다.
75세인 김경희 할머니와 손자까지 일가족 7명이 이번 19기수 등산학교 동문이 된 것.
귀여움을 독차지한 막내 손자 7세 김수민군도 힘든 교육과정을 잘 견디고 졸업장을 받았다.
딸이자 엄마인 김진선씨는 유명 병원의 응급실 의사, 사위 김석원씨는 대학에 재직 중인 교수.

슬랩을 등반 중인 김경희 교육생은 1947년생으로 올해 나이 75세이다.
놀랍게도 등산학교 입학은 슈퍼 할머니 김경희씨의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한국에 거주하지만 영주권자인 할머니 손에서 손주들이 자랐다.
그 손주들에게 특별한 추억과 자존감을 선물하고 싶어 등산학교 입학을 주장했다는 말.
클라이밍을 처음 해본다는 할머니는 슬랩에서 민첩한 몸놀림과 균형감각을 보여 준다.
처음이라지만 그 말을 믿기 힘들다는 강사들의 증언에 미소가 나왔다.
‘십년수목 백년수인十年樹木 百年樹人’이란 고사성어.
10년을 내다보며 나무를 심고, 100년을 내다보며 사람을 심는다는 말.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의 중요성을 비유하는 의미일 텐데, 등산학교가 그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좋은 산악인 양성으로 미주지역의 산악문화 발전을 도모한다는 멋진 슬로건이 그 말이니까.
이 구호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함께 공유해야 할 가치이자 명제일 것이다.
오 교장과 강사들이 교육생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나는 한국인이다.
우리는 모두 한국인이다”라는 구호.
이건 절대 국뽕이 아니다.

1주차 교육장인 위핑월Weeping wall 앞에 선 학생들.
한국에서는 평범한 말이겠으나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는 그 어감과 느낌이 다르다.
한국어가 서툰 교육생에게도 한국말로 교육한다.
한국 등산학교 교재와 한국어로 교육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스스로 자신의 뿌리가 어디인가를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미국은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내어야 한다.
결과보다 과정을 주요하게 생각하는 암벽훈련은 정신적으로 수강생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카파등산학교는 등반기술도 가르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것.
개인을 내세우지만 최고의 선으로 가족을 생각하는 게 미국이다.
그러므로 슈퍼 할머니 팀 외에도 가족단위로 참가하는 학생들이 더러 보인다.
가족 전체가 동문이 되는 가정.
바위를 등반할 때 함께 매었던 ‘자일의 정’이 새삼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76세로 최고령 학생인 정진택씨에게 졸업장을 전달하는 오석환 교장.
더불어 한국산악회 변기태 회장이 보내온 스카프를 졸업생들의 목에 매어 주었다.
미국 산을 제대로 즐기자!!
카파도 한국처럼 자신이 졸업한 등산학교에 자원봉사 하는 동문들이 많다.
이번 19회 후배들도 그들의 봉사가 큰 힘이 되었을 터.
그러나 만나 본 강사들은 산을 통해 기쁨을 나누고 봉사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고 입을 모았다.
우람한 샌 와신토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진 가운데 ‘타키즈 락’이 우뚝하다.
이 거벽은 북한산 인수봉에 취나드 길을 낸 이본 취나드와 로열로빈슨 등
미 서부 지역의 클라이머들이 등반을 하던 유명한 바위.
이때부터 유럽을 압도하며 여기서 태동한 클린등반과 십진법이 요세미티 거벽등반으로 이어졌다.
자신의 나이가 66세라고 밝힌 수강생 이상곤씨가 산 자랑을 한다.
“3,000m급 산이 부지기수인 LA는 산악운동의 바탕이 너무 좋습니다.
높고 수려하며 험준한 산이 병풍처럼 LA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지요.
워킹은 많이 했어요.
이곳 천혜의 자연을 좀 더 즐기기 위해 등산교육을 받으러 온 겁니다.
이번 교육에 대만족입니다.”

졸업 등반 후 타키즈 암봉 정상에 모인 19기 학생들.
곁에 있던 졸업생 강수잔씨도 한마디 거든다.
그녀의 나이 역시 66세.
“처음엔 힘들고 무서웠으나 이제 익숙해졌어요.
다른 커뮤니티에 등산학교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등산학교가 교민 사회에 보탬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미국문화 속에서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계승해 나가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 같고요.
산악 선후배님들을 만날 수 있는 인연도 즐겁고 고마웠습니다.”
그녀가 등산학교에 1,500달러를 기부했다며 누군가 슬쩍 귀띔한다. 등산학교가 추구하는 건 기술뿐이 아니다. 산악문화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외부 강사를 초청해 특강도 마련하고 있으며, 산악영화나 산악서적도 추천하고 있다. 당연히 학생이나 강사 모두 야영이 기본이다. 가족이라면 부모와 함께 야영 하며 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될 것이다. 생각의 나눔과 소통의 장이야말로 귀한 시간이었다는 오 교장의 기억.
“등산은 본국 한국인들처럼 여기도 그렇습니다.
연맹에 가입된 미주에서 한인들의 등산 활동은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중이지요.
고마운 일입니다.
산에서 배웠던 나눔과 협동이 산악인에게는 근본 아니겠습니까?
제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학교 출신 졸업생들이 사회생활에서도 반듯하게 잘살고 있는 걸 확인할 때입니다.”

김경희 할머니 가족. 할머니의 아이디어로 3대가 입교하며 등산학교 동문이 되었다.
학생대표의 감사 인사
등산학교 학생대표로 뽑힌 김민수씨를 만났다.
“등산학교에 참가한 우리는 큰 행운과 복을 받았습니다.
팬데믹 3년의 긴 시간을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지내느라 많이 지쳐 있었지요.
그런데 KAFA에서 19기를 모집한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우리는 가슴이 설고, 그런 설렘이 있었기에
저와 동료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수씨는 등반 첫날 바위 아래 도착해서 놀랐다고 한다.
강사들과 자원봉사자 선배들이 체험 수업을 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준비해 놓은 걸 보면서였다.
운영진들의 헌신을 보며, 산악인의 겸손과 사랑·봉사가 무엇인지 새삼 알았다는 것.
“대나무는 마디를 맺으면서 더 강해지고, 방패연은 바람이 강할수록 더 높이 난다고 했습니다.
시련과 성취는 같이 붙어 다닙니다.
그러나 시련을 이겨내야지만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성취감이 행복이란 선물로 전달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이번 교육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슴속에 잘 담아둘 것입니다.
언젠가 힘들고, 외롭고, 지쳤을 때 지금 이 시간을 다시 한 번 꺼내볼 수 있게 마음 한 곳에 잘 간직할 것입니다.”
말 참 잘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회자의 호명으로 학생대표인 그가 연단에 섰다.
“혼자라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함께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참으로 행복합니다.
등산학교라는 자동차를 제공해 주신 교장선생님 감사합니다.
그 자동차의 엔진과 모든 부품들을 제공해 주신 메인 강사님과 보조 강사님, 자원봉사자 선배님들 감사합니다.”
교과과정에 스피치 교육도 있었을까?
역시 말 참 잘한다.
진정성이 묻어나는 인사에 뭉클하다는 학생들의 반응.
그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
졸업장을 들고 마지막 석별의 정을 나눴다.
모든 사람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로 교차하며 악수를 나누는 일.
땡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이 보기 좋다.
등산학교를 졸업한 예비 산악인들의 건강한 산악운동이 이어져 산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