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차박 세계일주] 다섯 번째 이야기
중앙아시아 남자 8%는 징기스칸의 피가 흐른다!!
시베리아 3대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노보시비르스크~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사 박물관에서 만난 매머드.
이르쿠츠크에서 서쪽으로 1,000km를 가면 크라스노야르스크라는 도시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선 월북시인이라 잊혀진 오장환이란 시인이 있다.
정지용 시인의 제자이자 백석과 더불어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충북 보은의 생가 옆에 오장환 문학관이 있다. 그가 남긴 시 중에 <크라스노야르스크>(1949년)라는 시가 있다.
‘거친 들에 해 뜨고/
눈벌판에 놀이 붉던 씨비리/
막막턴 곳아!/오늘은/
하늘 높은 공장 굴뚝에 해 솟고/
가없는 밭이랑에 해가 지나니’
크라스노야르스크는 노보시비르스크, 옴스크와 더불어 시베리아 3대 도시로 꼽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수십 개의 공장이 지어졌으며, 종전 후 대규모 알루미늄과 금속 공장 등이 들어섰다.
아마도 오장환 시인은 종전 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크라스노야르스크 도시에 들러 이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스톨비 국립공원
예니세이 강이 도시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며,
강 옆에는 화강암 기둥들이 솟아 있는 스톨비Stolby 국립공원이 있다.
스톨비는 암벽등반이 유명한데 특히 로프 없이 단독으로 등반하는 것이 유명해 아예 이를 두고
‘스톨비즘’이라고 부를 정도다.
알렉스 호놀드가 널리 알린 ‘프리 솔로 클라이밍’이다.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가 ‘시베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극찬할 정도로 자연 경관이 뛰어나다.
하지만 스톨비는 산이라기보다 언덕에 가깝다.
트레킹 코스도 2시간부터 6시간까지 다양한데 루트 자체가 밋밋해서 걸을 맛이 안 난다.
험준한 알프스나 산이 높아서 고개를 한껏 치올려야 하는 히말라야보다
적절한 높이와 난이도에 따라 숨을 고를 수 있는 우리나라 산을 오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러시아 화폐 10루블에 나오는 성당
1805년에 지어진 파라스케바 성당은 러시아 10루블 지폐 그림이 되기도 했다.
문화시설로는 지역 역사박물관과 러시아의 역사화가 수리코프의 집을 개조한 미술관 등이 있다.
바실리 수리코프는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러시아 제국 아카데미의 관습적인 화풍과 달리 리얼리즘을 지향한 역사에서 소재를 찾았으며,
레핀과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화가이기도 하다.

크라스노야르스크의야경
죽음에 다녀온 도스토예프스키를 묵상하다
노보시비르스크는 ‘새로운 시베리아 도시’라는 뜻이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어 러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시베리아 최대의 공업 도시로 1950년대 이후 거대한 댐이 건설되어 근처에 ‘오브 해’라는 저수지가 생겼다.
‘해’라는 이름이 붙은 건 러시아 내륙 지역에서는 진짜 바다를 보기 힘들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규모가 큰 호수면 바다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댐 주변에는 ‘아카뎀고로도크’라는 과학연구 도시가 건설되어 기초 과학의 산실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대덕연구단지가 이 도시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20대에 대덕연구단지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자취를 하던 충남대학교 서문 앞은 모두 논밭이었다.
이제 60대가 되어 원조 도시를 방문하니 대덕연구단지와 오버랩된다.
모든 도시들은 생활의 편리함과 도시 자체의 효율성 추구로 인해 모습이 비슷해진다.
20대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슈퍼컴퓨터로 포트란 77이란 프로그램을 이용해 원자로 설계를 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러시아에서 국내 모바일서비스 장기정지 신청을 위해 노트북과 핸드폰을 가지고 반나절을 헤맸다. 요즘 세대들은 태어날 때부터 컴퓨터와 친숙한 세대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컴퓨터와 동조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프로그램식 사고방식이 아니라 뇌가 생각하는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
알고 보면 단순한 건데,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우선 짜증부터 난다.
아무래도 16비트 사고방식을 가지고 64비트짜리 프로그램을 처리하려다 보니 뇌의 용량이 못 따라가는 것 같다.
노보시비르스크의 문화 시설로는 국립 오페라 발레 극장이 있는데,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극장으로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보다 더 크다.
러시아 3대 도시인 만큼 미술관의 작품 수와 퀄리티도 여태껏 봐왔던 도시의 미술관과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트램(노면 전차)과 트롤리버스의 전선들이 하늘을 뒤덮고 도로 곳곳에는
포트 홀이 파여 점점 쇠락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은 러시아 대도시 중에서도 눈이 가장 많이 오는 곳으로 10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쉴 새 없이 눈이 내린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시베리아의 눈 덮인 벌판에서 라라를 찾아 헤매던 주인공이 떠오른다면 바로 이곳이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사 박물관
옴스크는 러시아 제8대 도시로서 처음에는 시베리아 유배지였다.
죄수들은 이곳에서 다른 시베리아 요새로 보내져 중노동을 했다.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도 4년 동안 이곳에 유배당했다.
오늘날 옴스크의 도시에서 옛날 시배리아 유형지의 모습은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퉁구스 인들이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대신 도로에는 일본과 한국, 유럽 차들이 즐비하다.
1849년 사형을 선고받은 28살의 도스토예프스키는 형장에 선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은 영하 50도의 추운 겨울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사람의 사형수와 함께 두 눈이 가려지고
단두대 위의 말뚝에 손이 묶인 채 집행관이 사형 선고문을 읽는다.
사형수들에게는 최후의 5분이 주어졌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정은 훗날 그가 펴낸 장편소설 『백치』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 “이 세상에서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5분뿐이다.
그중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데,
2분은 삶을 되돌아보는데,
나머지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는데 쓰고 싶다”고 술회했다.
총이 겨누어지고 발사되기 직전, 광장 저쪽 끝에서 말을 탄 황제의 특사가 흰 손수건을 흔들며 달려온다.
황제의 명으로 사형은 중지되고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된다.
만약 우리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 5분이 주어진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바위에서 암벽등반을 하다 떨어지면 불과 수 미터에 불과하지만 영화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지난날의 모습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옴스크 미술관
옴스크에서의 감옥생활 체험은 나중에 장편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 『학대받은 사람들』에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4년의 강제수용소의 생활은 험하고 지옥처럼 고통스러운 생활이었다.
먼지와 벼룩, 악취와 혼란, 낙인, 매질, 원망과 분노,
족쇄를 차고 사는 세월 속에서 겪은 체험을 쏟아 부은 책이 『죽음의 집의 기록』이다.
그의 위대한 장편들은 모두 유배 이후 씌어졌다.
체포, 독방 수감, 신문, 재판, 가짜 처형, 유형으로 숨 가쁘게 이어진 사건들은 이후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곳곳에 스며들어 다른 작가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강렬한 인물과 장면,
소재로 재생되었다.
체포와 신문은 『죄와 벌』의 유명한 형사 포르피리의 탄생에 기여했고,
재판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법정공방으로 재현되었다.
처형의 체험은 『백치』에서 사형수가 처형 직전 5분 동안 겪는 심리변화를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기술하기도 했다.
살인, 범죄, 자살 같은 끔찍한 주제가 그의 소설 대부분에 들어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소설이 한결같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사 박물관에서 만난 중앙아시아의 과거.
중앙아시아 유전자 8%의 비밀
이 세 도시는 카자흐스탄에서 매우 가깝다.
특히 크라노스야르스크와 노보시비르스크 아래쪽엔 알타이 공화국이 있는데,
이곳에는 알타이 산맥 최고봉 벨루하(4,506m)가 있다.
몽골쪽의 알타이 산맥 최고봉은 호이텡(4,374m)이다.
2001년에 대한산악연맹에서 주관한 한국청소년오지탐사대의 대장으로 호이텡을 올랐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당시 몽골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서쪽 끝의 바양울기까지 1,700km를
러시아 탱크처럼 바퀴가 엄청 큰 트럭을 타고 횡단한 적이 있다.
울란바토르를 떠나면 길은 비포장 도로여서 사방이 움푹 파인 초원이다.
트럭 뒤에 타고 있는 우리는 하루 종일 비명 아닌 곡소리를 내야 했다.
수십 킬로미터를 가야 몽골인의 거주지인 게르가 한 채씩 보인다.
사람을 좀처럼 보기 힘든 몽골인들에게 우리는 가는 곳마다 최고의 환대를 받았다.
특히 아무런 불빛도 없는 곳에서 텐트를 치고 자면서 바라보았던 밤하늘의 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몽골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15배 인데, 몽골 인구는 3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징기스칸이 살던 시기와 현재 몽골인구가 비슷하다고 하니,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만든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진화 유전학자 크리스 타일러-스미스는 지난 2003년 미국 인류유전학회지에 흥미로운 논문 하나를 게재했다.
중앙아시아 남성 2,123명의 Y염색체를 분석한 결과, 8%가 거의 동일한 Y염색체 배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에게만 유전되는 Y염색체를 분석하면 부계 기원의 추적이 가능하다.
즉, 중앙아시아의 각지 흩어져 사는 남성들의 8%가 한 할아버지의 후예라는 의미였다.
연구진의 조사 결과 그 할아버지 조상의 생존 시기는 약 700년 전에서 1,300년 전 사이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 시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남성 후보는 단 한 명뿐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광활한 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8%를 중앙아시아 전체 남자 인구수로 환산하면 약 1,700만명이다.
즉, 전 세계 남성의 0.5%가 그의 후손인 셈이다.
때문에 칭기즈칸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유전자를 남긴 이로도 꼽힌다.
중앙아시아 인구의 8%가 징키스칸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니!
내 피 속에서도 그 옛날 말을 타고 몽골과 러시아 알타이 지역을 호령하던 때의 기억을 지닌 유전자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은 차를 가지고 러시아 지역을 하루 700km 이상 달리고 있다.

발레리 수리코프 미술관의 한 작품.
114년전 퉁구스 대폭발의 수수께끼
1908년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포트카멘나야 퉁구스카 강 부근 밀림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사방 25㎞의 동심원 안에 있는 나무 수천만 그루가 쓰러졌으며,
순록을 비롯해 숲에 살던 모든 동물이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바이칼 호에서 북쪽으로 1,000km 떨어진 퉁구스카 강 부근에서 일어난 대폭발은 약 60㎞ 떨어진 마을에까지 뻗쳐
은식기가 녹아내릴 정도였고, 450㎞ 떨어진 곳에선 운행하던 열차가 심한 땅울림에 전복될 정도였다.
그날 폭발한 에너지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185개에 해당하는 위력이었으며,
폭발지점의 주변 공기 온도는 무려 2만 4,700℃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히 폭발한 지역은 반경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단 한 명도 살지 않는 외진 곳이었기에
인명 피해는 전혀 없었다.
일명 ‘퉁구스카 대폭발’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UFO 충돌설,
블랙홀 추락설 등 수많은 소문을 낳으며 러시아 최대의 미스터리로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항공우주국NASA 등에서는 이 사건이 소행성이나 혜성이 지구 대기에서
폭발하면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류의 관측 역사상 우주 물체의 최대 폭발사건으로 기록된 퉁구스카 대폭발 이래,
지난 2013년 러시아 우랄산맥 부근 첼랴빈스크 상공에서 다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이곳은 내가 러시아에서 발틱 3국 중 하나인 조지아로 넘어가는 경유지이기도 하다.
그 충격파가 지상으로 전해지면서 건물 유리창이 무더기로 파손되었으며,
일부 건물은 천장과 벽이 무너지기도 했다.
유리 파편 등에 맞아 약 1,500명의 부상자가 병원을 찾았으며, 40여 명이 입원했다.
한 시민이 우연히 촬영한 운석의 낙하 장면은 유튜브에서 수많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추수가 끝난 시베리아 밀밭에 소들에게 먹일 밀짚 더미들이 깔려 있다.
백악기 말 지구상의 모든 공룡들을 일시에 멸종시킨 주범으로서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가설이
‘운석 충돌설’이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남은 지름 300㎞의 거대한 운석 충돌구가 바로 그것이다.
그 정도의 크기라면 지름 약 10㎞ 이상의 거대한 혜성이 초속 20㎞의 속도로 충돌해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약 10억 배에 이르는 충격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소행성 충돌을 전후해 이미 지구상에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런 결과가 지구온난화와 해수 산성화를 가속화하면서 공룡 등 지구 생명체의 약 4분의 3이 멸종했다.
한때 공룡들의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작은 몸집의 포유류들 중 일부만 살아남았다.
그 포유류들이 진화한 결과, 약 600만 년 전 고릴라와 침팬지 등 다른 유인원과 분화해서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아 인류 문명을 발전시킨다.
그런데 그런 인류의 발전이 독약이 든 성배가 되어 기후온난화의 주범으로 지구를 멸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차로 운전하다보면 이곳 시베리아의 광대한 벌판에도 곳곳에 플라스틱 비닐봉지와 쓰레기들이 바람에 휘날린다.
시베리아의 차가운 바람만큼 내 마음 속에도 착잡한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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